구석기시대부터 장수군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이 2003년 장수 침곡리 구석기 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의 흔적은 1997년 천천면 남양리와 월곡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본격적으로 농경문화가 시작되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은 금강의 지류인 장수천, 장계천과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을 중심으로 20여 개소, 1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이후 삼한시대와 관련해서, 장수 남양리유적과 침곡리 유적에서 장수군의 지역색이 강한 삼한시대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남양리 유적은 초기철기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기원전·후 장수의 철기문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95년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발굴조사를 통해 수백점의 가야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지역민인 故한홍석옹의 결정적 제보로 시작된 조사를 통해 백제의 변방지역으로 인식되었던 장수가 고대 가야의 왕국이 자리했던 것을 알리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240기의 왕릉급 고총과 22개소의 봉수유적, 4개소의 고대산성, 70개소의 철생산유적이 확인되었으며, 2019년 장수군 최초로 동촌리 고분군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고대 산업경제의 중심인 철생산유적과 정보통신기술의 원조인 봉수유적들은 장수의 역사에서 대표성을 지닌다.
이처럼 장수군 전역에 걸쳐 화려함을 수놓은 가야유적은 풍요로운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군민의 삶에 있어 자긍심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수군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때 장계면은 백해(이)군, 장수읍에는 우평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660년 백제가 신라에 멸망하고 이들 지역은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후 757년 신라는 백해(이)군을 벽계군으로 고쳐 진안과 고택을 영현으로 두었으며,
우평현은 고택현으로 고쳐 벽계군의 영현이 되었다.
이후 776년에는 벽계군과 고택현은 백해(이)군, 우평현으로 바뀌었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으로 둘러쌓인 장수군은
예로부터 육십령, 방아재, 치재, 집재 등 주요 고갯길을 따라 교통로가 발달되었다.
특히 백두대간으로 따라 확인되는 철생산유적들은 장수군이 고대 산업경제의
중심지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